손주의 폐렴 때문에 아들은 만남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었다. 어버이날이라고 아들네와 손주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야호"를 외쳤었다. 기대가 무너진 실망감보다 응급실 다녀왔다는 손주 걱정에 가슴을 졸였었다."연차 내고 5월 말에 갈게요" 다시 온 아들의 전화에 "오, 예" 깃털 같은 기쁨을 만끽했는데, "애가 열이 나서 또 응급실에 뛰어갔네요"란 아들의 연락. 아들은 두 번이나 약속을 깨려하고 있으니, 아이고 이건 또 뭔 소리람......아들 며느리가 좋아하는 한우와 양고기를 사다 놓고, 코다리찜과 새우볶음 등. 자신 없는 요리임에도 열심히 실력발휘를 하고 있었다. 김치도 네 종류나 만들어 놓고, 뭐든 빠뜨리지 않으려고, 메모하고 확인하기를 여러 번. 근데 또 못 내려온다니...... 손주 안아보려고 나름 ..

내가 먼저 가자고 부추겼다. 계절의 여왕 5월이지 않은가? 산행이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청년 같은 5월의 초록을 만끽하고자 그랬는데 정작 나만 빠졌다. 5명이 계획한 소풍은 그래서 4명만 출발했다.여유 있게 데크에 앉았지만, 머릿속에선 우선순위를 세고 있다. 빨래하고, 현관과 2층을 청소하고 무엇보다 손주 놀이터인 텐트를 청소해야 한다. 그리고 음식을 해야겠지. 어른용 장조림은 먼저 꺼내고, 손주 먹을 것은 더 익혀서 부드럽게 해야 할 거야. 지난 설에 며느리가 잘 먹던 오이지무침도 오늘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손주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등을 생각하는 그 일조차도 신이 난다. 주말에 온다는 아들네와 손주를 본다는 일이 이리도 즐거운 일인 건가......?빨래를 널고, 청소하고 있을 때 윗..

"언니들, 오늘은 걸어서 면에 갑니다." 지난주엔 동네 산에, 엊그젠 강변으로, 오늘은 고수부지를 끼고 면내에 가자고 한다. 누가 감히 옥이의 제안을 거절하겠는가? 우린 10시에 가벼운 차림과 모자를 장착하고 옥이네 집으로 모였다.이게 얼마만인가? 작년 가을 이후 올 들어 처음이다. 강가엔 초록이 5월을 감싸 안았고, 산책로엔 좌청룡 우백호 꽃들이 지천이다. 요즘 가로수로 인기 있는 이팝나무와 씀바귀, 이름 모를 보라색꽃과 산붓꽃. 토끼풀꽃 등이 싱그럽고 앙증맞다. 계절의 여왕은 꽃이 다하는 것 같다. 걸어서 도착한 면에서 옥이는 옥수수모종을, 난 마트와 장육점을 들러 장을 봐왔다. 5월 중순까지 이상 저온이더니 오늘은 걷기가 힘들 만큼 햇볕이 따갑다. 그런데도 5월은 소풍처럼 밝고 아름다우니 룰루랄라 ..
우선 "AI란 무엇인가"라는 다소 복잡하며 범위가 넓은 질문부터 해 보자. AI가 무엇인지에 대해 기술적, 경제적 혹은 윤리적이나 종교적인 형태의 다양한 답변이 존재한다. 여기에서는 인문학의 관점에서 인간사회의 AI 지위에 대한 논의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하려 한다. 첫 번째 논의 지점은 AI의 개체성, 그리고 독립성에 대한 것이다. AI는 무엇에, 특히 '인간에 속한' 존재인가, 아니면 '독립성'을 가진 개체인가. 우선 무엇보다 분명한 AI의 존재론적 특성은 그것이 인공물이라는 점이다. 보통 사람들은 인공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것을 더 우월한 존재로 여긴다. 화장품이나 음식에 "자연 물질 포함"이나 "유기농"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었을 때 대중의 선호도가 높아진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은..
반면 소위 말하는 요즘 아이들에게 사진은 놀이다. 사진을 찍는 것부터 시작해 이미지를 보정하고, 거리낌 없이 SNS를 통해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 공유하는 것까지 그들에게는 즐거운 놀이라는 인식이 크다. 이런 시대에 사진과 그 안의 얼굴은 더 이상 무엇인가에 대한 증명이 되기 어렵다. 더불어 그저 정보로서 소비되는 이미지들 자체가 무언가의 정체성을 보장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대상이 되었다. 누군가의 SNS에 올라온 프로필 사진을 보며 그것이 그 사람의 '진짜'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결국 도구의 변화와 함께 인간의 얼굴은 다시 진화의 기로에 서 있다. 그리고 그 도구의 중심에는 AI(Artificial Intelligence)가 있다. 2024년에는 청소년들 사이의 딥페이크 범죄가..

성당 야외미사 행사로, 삼척에 갔다. 버스 두 대에 81명이 이동하는 큰 행사다. 새벽에 일어나 준비하는데, 소풍 가는 학생처럼 마음이 더 분주했다. 버스에서 낯익은 교우들과 인사를 하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반가운 건 무슨 이유일까? 모두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인원 점검과 간식 배부 등 여늬 여행과 다를 바 없는 행사는, 교우 모두 기도를 할 때 감동으로 다가왔다. 버스에서의 기도라니...... 두어 시간여 이동해서 도착한 곳은 '진 야고보(James Maginn) 신부님'의 순교지. 1911년 미국에서 태어나신 신부님은 아일랜드로 이민, 신학공부를 하시고 사제품을 받으셨다. 1936년 한국에 입국하신 신부님은 전라도 순천, 강원도 평강과 이천, 홍천, 삼척 성당에서 선교 활동을 하셨다고 한다...
- 얼굴의 진화 -호모 사피엔스가 현재와 같은 발전을 이루고 살아가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 것 중에 '얼굴'이 있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의 얼굴'은 오랜 기간에 걸친 진화의 산물이다. 여타의 유인원들과 다를 바 없었던 호모 사피엔스가 수많은 '호모' 종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야생동물과 거친 자연 속에서 살아남는 데에 '사회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인간의 얼굴에는 그 변화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거대한 사회를 이루고 또한 그 안에서 개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기 위해 인간의 얼굴은 다양한 기능을 한다. 우선 얼굴은 소통의 핵심 역할을 하는 신체 부위다. 정교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발달한 턱과 혀의 구조,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이 사용하는 비언어적 표현의 핵심이 되는 표정의 출..

"그게 언제였더라?"된장을 담그고, 된장에서 분리한 간장이 있었는데......그걸 까먹고 국간장을 사려고 했다. 그러다 장독의 간장이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2년 전, 생전 처음 된장을 만들었는데, 간장은 그 때 생긴 덤이다. 2년여 만에 간장독을 열어보니, 간장은 처음보다 반은 줄어있었다. 수분이 증발해서 남은 간장은 장독대 밑에 낮게 깔려 있었다. 플라스틱 물통에 따르니 한 통도 다 채워지지 않은 양이다. 그러나 내겐, 대견한 간장 귀한 간장이라서 vip처럼 고이 고이 모셔두었다.간장 보다 소금 결정체로 남은 찌꺼기가 더 많을 정도. 이 소금 또한 덤으로 얻었다. 그러나 내가 반한 건 간장도 아니요, 소금도 아닌 빈 항아리. 무엇보다 빈 항아리를 귀하게 모셨으니 일석이..